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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상

벌초 다녀온 후기.

지기유 2020. 9. 20. 01:09

아쉽게 사진은 못찍었다... 원래 내가 가는 게 아니라 아빠가 가실 예정이였는데 갑자기 일이 잡히시는 바람에 땜빵으로 다녀왔다.
풀 베는 건 군대 있을 때 이후로 처음이고, 뭔가 일가 친척들과 어울려 활동적인 일을 해 보는 건 전역이후 처음이였다. 이 때문에 해이해졌기 때문일까, 자외선이 내리쬐는 곳 아래에서 선크림 바르는 것도 깜빡했고, 뜨거운 햇빛에 손실되는 수분을 보충할 물을 챙기는 것도 깜빡했다. 원래도 안좋은 체력이 최악의 상황을 만나 더 안좋아졌다. 걸을 때마다 어는 현기증과, 뜨거운 햇빛으로 인해 피부가 익을듯이 작열했다. 정말 다행스럽게도 오전중으로 금방 끝나 더이상의 피해는 막았지만, 혹여나 일이 늦게 진행돼 오후까지 작업이 이루어졌다면 어떻게 됬을 지 모르겠다. 물론, 준비는 했겠지만.
오늘 벌초를 하면서 한가지 다짐을 했다. 나는 무덤에 뭍히지 않을거라고. 무덤은 관리하기가 까다롭다. 해마다 자라나는 풀을 뽑기 위해 일가친척들이 총동원되고, 그에 온갖 고생은 다 하고. 애초에 내가 뭍힐 자리나 있을는지. 결혼을 할 지 말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, 내 후손이 생긴다면 귀찮게 해주고 싶지 않다. 나는 죽으면 화장 후 바다에 뿌려져서, 명절 때 마다 그곳으로 찾아 와 나를 추억해주는 것만으로도 참 고마울 것 같다. 아니, 명절때도 아니고, 그저 몇년에 한번, 몇십년에 한번 찾아와도 좋으니 나를 추억해줬으면. 그마저 여의치 않는다면 나는 잊혀도 좋다. 나는 죽어서 조차 누군가의 아버지, 아들이 아닌 그저 이 별의 여행자로 살고 싶다. 파도에 몸을 맡기고,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.
아마 내년에도 벌초를 하러 올 것 같다. 이렇게 한탄했지만, 조상님들을 원망할 생각는 없다. 나의 바램은 가슴속에 넣어두되 잊지말고, 다만 자식으로서의 도리는 해야할 것이다.